분량은 적지만 알찬 일본근현대사책 <일본이라는 나라?>
- 책
- 2020. 10. 6.
"비록 이 책은 분량이 적지만, 일본근현대사의 구조와 흐름을 매우 간결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진중하고 울림이 큰 책이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무엇인지 아는가? 아니 그에 앞서 메이지 시대가 어떤 시기였는지 알아야겠다. 메이지 시대는 바로 일본에서 '국가'라는 기본적 구조가 만들어진 시대였다. 이 시대를 알아야 일본이라는 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메이지 시대의 베스트셀러
그럼 다시 질문. 일본의 건국 시대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일까? 1만엔 짜리 지폐에 그려진 사람이 쓴 책이다.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이다. 아래는 그중 한 대목이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이 넓은 인간세상을 둘러보면,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유복한 사람도 있다. 또 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천한 사람도 있다. 그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은 참으로 명백하다. ……현인賢人과 우인愚人의 차이는 공부를 했는지, 안 했는지 여하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는 어려운 일도 있고, 간단한 일도 있다. 어려운 일을 하는 자를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명명하고, 간단한 일을 하는 자를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로 정신노동이나 관리직은 어렵고, 손발을 쓰는 육체노동은 간단하다. 그러므로 의사, 학자, 정부의 관리, 큰 상업을 하는 기업인, 많은 사람을 부리는 대지주 등은 신분이 높고 귀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빈부귀천의 차이는 없다. 단 노력하고 공부해서 사물을 잘 아는 자는 귀인이 되거나 부자가 된다. 배우지 못한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되거나 비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동등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공부한 놈은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놈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된다. 공부 좀 해라. 이것이 바로 베스트셀러 작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학문의 권장》에서 말하고자 한 내용이었다.
그럼 왜 공부한 사람은 훌륭해지는 걸까? 공부라는 건 하고 싶은 사람들만 하면 되지 않을까? 일본의 근대는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872년 일본 정부는 근대적 학교 교육 제도인 학제를 공포했다.
학제를 토대로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가 전국에 세워지면서, '의무 교육'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메이지 시대에는 의무 교육을 강박 교육이라고 쓰기도 했다. 나라 안의 아이들을 '강박'해서라도 학교에 다니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는 하고 싶은 사람들만 하면 되는 건데, 그게 아니라 억지로라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제도가 생긴 것이다.
공부한 놈은 훌륭하게 되고, 공부하지 않은 놈은 비천한 놈이 된다
후쿠자와는 1883년 《학문의 독립》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강박법을 찬성하는 자로서, 전국의 아들딸들이 태어나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반드시 취학을 시켜야 하며, 취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무리를 해서 억지로라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정부의 권위를 이용해서라도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국민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 "공부한 놈은 훌륭하게 되고, 공부하지 않은 놈은 비천한 놈이 된다"라는 후쿠자와의 주장은 당시에는 굉장히 획기적이었다.
후쿠자와가 《학문의 권장》을 발표한 때는 '학제'가 공포된 해인 1872년이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전의 에도 시대는 '공부한 놈이 훌륭하게 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에도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무사의 아들은 무사, 상인의 아들은 상인, 농민의 아들은 농민이 되고, 여자는 같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한다"라는 원리로 세상이 돌아갔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었다.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식들의 신분과 직업이 자동으로 결정되었으니까 말이다.
에도 시대가 끝나 신분 제도가 폐지되었다. '무사의 아들은 무사'라는 공식이 깨졌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을 썼다. 이제부터는 신분이 아니라 학문으로 경쟁을 하는 자유 시대이고, 부모가 농민이라도 공부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 가라
그럼 과연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개인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의무 교육 제도를 만들었을까? 1872년 일본 정부는 학교 제도의 기본이 되는 '학제'를 발표하면서, '학문은 출세할 수 있는 재산과 자본'이라는 식의 문서를 함께 내놓는다. "학문은 입신양명의 밑거름이다. 그러므로 학교에 가라"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유 경쟁 시대가 되면서, 에도 시대의 지배자였던 무사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무사면 자신도 무사가 되는 특권이 있었는데 신분 제도가 없어지면서, 그러한 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메이지 유신 뒤에는, 신분제 폐지를 반대하는 무사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제일 큰 반란이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를 필두로 한 사쓰마 번(현재 가고시마현)의 무사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를 세이난 전쟁이라고 한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면서 일본 정부는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자유 경쟁 시대를 만드는 데 주력한다.
그렇다면 정부의 목적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겠다는 것뿐이었을까? 그뿐만은 아니었다. 정부가 노린 자유 경쟁 사회의 목적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 나라 안에 무지한 국민들이 있으면 외국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무지한 국민들은 자기 나라를 지키려 싸우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일반 국민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소수의 지배자들이 나라를 멋대로 다스릴 수 있다. 농민이나 도시 주민들은 무지하여 정치를 오직 무사에게만 맡겼고, 그래서 권력은 무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시대가 에도 시대였다.
평화로울 때는 이런 사회가 좋을지 모르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농민이나 평민은 모두 제 나라를 나 몰라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배 계급뿐 아니라, 일반 국민도 교육해야 한다.
실제 이러한 사태가 에도 막부 말기에 일어났다. 조슈 번(현재 야마구치현)에서 유럽과 미국 4개국 연합 함대와 전쟁을 했을 때, 맞서 싸웠던 자는 조슈의 무사들뿐이었고, 농민이나 평민은 "전쟁이나 정치는 무사들의 일이지 않은가" 하며 모른 체했다.
이런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신분 제도를 없애고 농민과 평민을 교육해서 그들 자신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는 지위로 출세할 가능성이 있음을 자각시켜야 한다는 것이 후쿠자와의 주장이었다. 《학문의 권장》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새로운 시대의 원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옮긴 번역가는 1년 가까이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할 때가 되자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일까, 라는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선뜻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용이 아주 알차서 직접 번역까지 한 것이다.
원서 표지를 보면 짐작하겠지만, 이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썼다. 이 얼마나 유치찬란한 표지인가. 저 두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은 뭘 의미하는 걸까? 머리카락은 왜 금발일까? 이 책을 다 읽어도 왜 저 아이들 머리가 금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히 알게 되리라. 일본이 근대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저 아이들 표정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고 난 뒤의 표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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